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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연구의 필요성

문화유산은 그 민족의 자존(自存)이며 자존(自尊)이다. 문화재청에 따르면 “중요무형문화재는 연극, 음악, 무용, 공예기술 등 무형의 문화적 소산으로서 역사적․예술적 또는 학술적 가치가 큰 무형문화재 중에서 중요한 것”이라는 정의가 되어 있다.1) 전통문화의 정체성은 고유한 특징을 지키며 문화로서 그 민족과 국가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전통문화는 국가에서 인멸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문화재보호법으로 지방무형문화재와 중요무형문화재 지정을 통해 전통문화를 보존해 왔다. 여러 무형문화재 중 '종묘 및 종묘제례악(2001), 판소리(2003), 강릉단오제(2005), 강강술래(2009), 남사당(2009), 영산재(2009), 제주 칠머리당영등굿 (2009), 처용무(2009), 가곡(2010), 대목장(2010), 매사냥(2010, 다국적 유산), 줄타기(2011), 한산모시짜기(2011)'는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2) 으로 선정이 되었다.3) 

 

특히, 최근에 세계무술 가운데 최초로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된 택견은 1983년 6월 1일 문화재청으로부터 중요무형문화재 지정을 받았다. 그로부터 약 28년 만에 전 세계 모두가 아는 쿵푸를 제치고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서 기존 제례행사나 전통놀이와는 다르게 택견이라는 무예가 등재된 것은 분명히 의미가 다른 것이라 할 수 있으며, 택견계를 비롯한 구성원들과 대한민국의 체육, 무예인들에게는 희망적인 사건일 것이다.

 

과거 택견이 언제 발생해서 전승됐는가에 대해서는 명확하지 않지만, 문헌을 통해 추정할 뿐이다.4) 택견은 관한 기록은 조선 시대부터 나타나는데 22대 임금인 정조 시대에 『재물보(才物譜)』5) 서 ‘탁견’이라는 명칭으로 기록하고 있다. 1895년 Stewart Culin은 HTAIK-KYEN-HA-KI6) 로 택견에 대해 언급을 하였는데 이 내용에 대해서는 의견이 서로 달라7) 주목해 볼 필요가 있을 것으로 사료된다. 안확의 『조선무사영웅전』 유술(柔術)편8) 에서는 씨름과 소이한 택견이 있다는 기록이 있으며, 『조선어사전』9) 에서 ‘탁견’이라는 명칭이 아니라 ‘택견’으로 기술하고 있다. 1921년 최영년의 『海東竹紙』10) 에서는 ‘탁견’이라는 명칭과 모습에 관해 기술하고 있다. 리선유(1933)의 『오가전집』11) 에서는 ‘착견’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으며, 문세영(1952)의 『우리말 사전』12) 에서는 ‘태껸’이라 다루고 있다. 조선시대의 기록에는 자세한 택견의 동작이나 기술을 서술한 자료가 부족한 실정이다. 조선시대에 택견을 표현하는 대표적인 사진이나 그림으로는 1836년 혜산 유숙(劉淑) ‘대쾌도(大快圖)’와 연대 작가 미상으로 외국인 선교사가 찍은 ‘애기 택견’ 사진이 있는데, 이 자료에서 택견의 모습과 형태는 보이지만 기술적인 모습을 확인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조선시대 이후, 택견의 기록과 모습이 공식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1958년 경무대에서 실시된 ‘이승만대통령 탄신기념 무도대회’에서의 시범이다. 이곳에서 택견 전승자 송덕기는 예전에 함께 택견을 배운 김성한(金成漢)과 중구 소공동에 있던 유도중앙도장에서 택견 시범을 보였다. 이후, 1964년 5월 16일 자 한국일보에 「속인간문화재(續人間文化財)-택견: 宋德基」라는 기사에서 예용해13) 는 송덕기와 같이 택견을 세상에 소개하였고, 1970년 신한승을 만나 그에게 5년간 택견을 가르쳤다.14) 

 

1973년 문화재위원으로 있던 예용해는 「무형문화재 조사보고서 제102호」15) 에서 송덕기의 택견 기술과 보유현황을 조사․제출하였으나 기술이 적다는 이유로 반려되었다. 그 뒤 1981년 오장환은 「택견 무형문화재 지정 조사 의뢰서」를 제출하였고, 당시 문화재위원이었던 임동권(1982)은 「무형문화재 조사보고서 제146호」를 작성하여 1983년 ‘중요무형문화재 제76호’로 지정받게 되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택견 원형에 관한 문제는 항상 제기되어 왔다. 이 문제는 택견이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을 받는 1983년부터 꾸준히 발생하여 왔는데, 문화재 지정과정에서 온전하게 택견의 형태를 보유한 송덕기의 택견 동작과는 다른 형태로 문화재 지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송덕기의 기술을 조사하여 담은 당시의 문화재 위원들의 보고서를 비교해 본 결과, 1973년 예용해의 「무형문화재 조사보고서 제102호」의 송덕기 택견 기술은 11개라고 기술(記述)한 것에 반해, 1981년 오장환의 「택견 무형문화재 지정 조사 의뢰서」는 기존의 자료와 다르게 분량이 늘어 있었다. 또한 송덕기와의 갈등이 표출 되었던 ‘활개짓’은 오장환의 보고서에 따르면 “김홍식 옹의 활개짓, 품밟기 및 몇 가지의 발질을 보았으나 전모가 확실하지 않고…”라고 기술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화재 지정 이후, 1983년 이보형의 「택견 무형문화재 전수실태 조사」에서는 신한승이 17세에 활개짓을 배우고, 다시 47세가 되어 1974년 김홍식에게 배웠다고 기술하고 있는 것은 확실하지 않은 내용을 문화재 지정 의뢰 보고서에 작성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기술(技術) 조사 내용에 있어서도 예용해, 오장환, 임동권, 이보형의 경우 같은 내용이지만 기술(技術)의 내용과 명칭이 조금씩 변화해 가는 것을 확인 할 수가 있다.16) 그 보다 빠른 시기인 1971년 대한태권도협회의 「살아있는 태껸인 송덕기 옹」『태권도』 제3호에 기술 14개만 제시되어 있음을 통해서도 기존의 기술 조사가 미약하였음을 알게 되고,17)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된 택견의 형태가 송덕기의 택견 형태와는 다르게 지정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상의 내용으로 볼 때, 기존에 실시된 조사와 기록에 문제점이 있었고 송덕기가 보유한 체계와 다른 형식으로 택견이 문화재로 지정된 후, 택견의 전승자들은 택견 원형에 대한 서로의 이견과 차별화된 해석 그리고 단체 간의 이익과 개인적인 감정에 의해 각자의 길을 걷게 되었음을 알게 된다.18) 이렇게 시작된 단체 간 경쟁은 양적, 질적 성장이 가속화되어 수련 인구와 인지도의 증가를 가져왔지만, 택견을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와 계속되는 경기규칙의 변화, 수련체계의 개정으로 차별화된 발전을 꾀하는 상황으로까지 진행되었다.19) 이러한 양상은 경기의 발전과 방향에도 영향을 미쳤는데 초기 택견 단체 간에도 서로 다른 경기 규칙을 가지고 있었으며,20) 이 경기규칙에 따라서 단체마다 추구하는 바가 달라 변질되고 있는 실정이다.21) 그리고 이후 택견 원형의 진정성을 둘러싸고 법정 소송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는 사태가 발생하였다.22) 대한체육회의 권고사항23) 에 의하여 2007년 택견은 통합을 원칙으로 정식 가맹되었지만, 통합이 이루어지지 않아 그 문제는 계속적으로 대두되고 있다.24) 

 

이러한 경향은 택견의 고질적인 문제이다. 그리고 이 문제는 구한말 이후, 인멸의 위기에서 택견의 기능을 보유한 송덕기에 대한 이해부족에서 시작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즉, 수많은 택견인(人)들에 의해 택견 원형에 대해 지적과 논란이 있었고 통합을 위해 많은 노력을 진행하였지만, 전수단체 간의 합의점을 찾기 어려운 것은 택견의 원형을 보유한 송덕기에게 주목하지 않았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송덕기와 함께 초대 인간문화재였던 신한승25) 이 문화재 지정에 기여한 공(公)도 크지만 지금과 같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볼 때, 그 원인은 송덕기가 보유한 택견의 형태에 대해 이해가 부족하였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일제 강점기 이후, 인멸의 위기에 놓여있던 택견이 다시 세상에 드러나고 지금과 같은 모습을 갖출 수 있는 것은 초대 예능보유자였던 송덕기라는 인물이 택견의 온전한 형태를 지녔기 때문에 가능하였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위와 같은 택견의 문제점 해결을 위해 기존의 연구들은 문화재 지정 과정에서 송덕기가 전수했던 형태로부터 변화된 점을 인식하지 않고, 송덕기가 보유한 형태에서 변화되어 정형한 자료를 기반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했던 것이 사실이다.

 

송덕기에 대한 연구가 존재하지만, 기존의 도서와 연구마다 제시하는 시기, 기술의 명칭과 기술체계가 다르게 제시된 점도 확인할 수가 있다. 또한, 제자마다 이야기의 차이가 조금씩 있어26) 기초자료의 부족과 검증의 부재라 판단하였다. 따라서 이 연구는 택견의 순수성을 몸에 고스란히 지니고 있는 송덕기의 생애와 택견기술 등의 전수내용을 구술사 연구방법을 통해 생존해 있는 송덕기의 직계 제자들 및 주변 인물들을 대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Notes

  1. 문화재청 홈페이지(http://www.cha.go.kr/korea/heritage/knowledge/notion_01.jsp?mc=NS_04_02_01) 2012년 4월 8일 검색.

  2.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은 1997년 제29차 총회에서 산업화와 지구화 과정에서 급격하게 사라지는 무형문화유산을 보호하고자 '인류 구전 및 무형유산 걸작 제도'를 채택했다(유네스코세계유산, http://www.unesco.or.kr/heritage/ich/index.asp), 2012년 4월 8일 검색.

  3. 국가에서는 전통문화가 인멸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문화재보호법으로 무형문화재 지정을 통해 전통문화를 보존해 왔다. 여러 무형문화재 중 종묘 및 종묘제례악(2001), 판소리(2003), 강릉단오제(2005), 강강술래(2009), 남사당(2009), 영산재(2009), 제주 칠머리당영등굿(2009), 처용무(2009), 가곡(2010), 대목장(2010), 매사냥(2010, 다국적유산), 줄타기(2011), 한산모시짜기(2011)는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선정이 되었다(유네스코세계유산, http://www.unesco.or.kr/heritage/ich/list.asp) 2012년 4월 8일 검색.

  4. 이병익․임희용․이재학, 1998 「택견의 변천과정에 관한 연구」『무도연구소지』 9권 1호, 210쪽에서 “택견에 대한 문헌적 기록은 조선말 시조에 등장하고 있는데, 이 이전의 택견에 대한 문헌상의 기록은 없으며, 조선시대 전기에서 후기로 이어지는 택견의 역사적 공백은 택견의 원류를 찾는데 있어 상당한 논란의 소지가 있다. 따라서 택견의 역사적 기원을 살펴보기 위해 수박과 택견의 역사적 연관성을 찾지 못한다면 택견은 조선말부터 시작된 무예일수 밖에 없다고 생각되어진다.”라고 해석을 하고 있다. 이 연구에서는 수박의 연관성에 대하여는 제한을 두었다.

  5. 이만영, 1675 『才物譜』 기희조(技戱條)에는 「卞 手搏爲卞 角力爲武 若今之탁견」 “수박을 변(卞)이라고 각력(角力)을 무(武)라 하니 지금의 탁견 같다고 하였으며, 수박조(手搏條)에서는 수박은 지금의 수벽과 같다.”라고 말하고 있다.

  6. Stewart Culin, 1895 Korean Games: With Notes on the Corresponding Games of China and Japan, Philadelphia: University of Pennsylvania, p.38

  7. 위의 자료를 토대로 대한택견협회(現대한택견연맹)의 이용복은 ‘대접’이라 하는 규칙을 적용하였는데, 한 발을 상대가 공격할 수 있는 거리로 내어 주어 거리를 가깝게 하는 방식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송덕기 측근에서 배웠다고 알려진 제자들은 “단 한 번도 그런 방법을 듣지 못 하였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논란이 되고 있다. 그 논란은 대한택견연맹의 커뮤니티 사이트인 택견코리아의 게시판(http://www.taekkyonkorea.com/bbs/boardpub/dir.php?wh=free)에도 ‘택견하기’로 검색을 했을 때 나오는 수 많은 논란이 있으며 이것에 대한 논란은 결련택견협회의 홈페이지 게시판과 택견배틀 홈페이지 게시판(http://www.tkbattle.com/bbs/zboard.php?id=free)에도 논란이 되었다.

  8. 안자산, 1919 『朝鮮武士英雄傳』 유술(柔術)편 “유술은 수박(手搏) 권법(拳法) 권박(拳搏) 각저 상박(相撲)이라고도 한다. 씨름은 오직 육박(肉搏)으로써 각투에 불과한 것이고, 유술은 인체 근육의 혈맥을 쳐서 죽이기도 하고 어지럽게도 하며 벙어리가 되게도 하는 삼법이 있어 학술적으로 되어진 것이다… 근래에는 청년들이 씨름보다 소이(小異)한 박희를 행함이 있던바, 소위 택견이라 하는 것이 그 종류다.”

  9. 조선총독부, 1920 『朝鮮語辭典』

  10. 최영년, 1925 『海東竹紙』 “각술이라는 옛 풍속이 있는데, 서로 마주 보고 차서 넘어뜨리는 것이다. 세 가지 법이 있다. 가장 낮은 것은 상대방 다리를 차고, 잘하는 사람은 어깨를 차고, 높이 차는 자는 상투를 찬다. 이것으로 원수를 갚기도 하고, 돈내기나 여자를 빼앗기도 하였다. 관에서 금하여 지금은 없어졌다. 이를 일러 탁견이라 한다.”

  11. 리선유, 1933 『五歌全集』 박타령에서는  “곱사등이 뒤집어 노코 앉진방이 착견하고 배알넌놈 몽둥이질”라는 대목이 나온다.

  12. 문세영, 1952 『우리말 사전』 한 발로 서로 상대방의 다리를 차서 넘어뜨리는 경기(각희脚戱).

  13. 예용해(1929~1995)는 전통문화의 연구․보존과 발전을 보람으로 산 언론인이다. 우리 고유의 문화와 인간문화재에 깊은 관심과 애정을 품고 문화재전문위원을 지내며 많은 조사 보고서와 『예용해 전집(대)』을 남겼다.

  14. 정경화, 2002 『택견원론』 87쪽. 송덕기로부터 5년간 전수를 받았지만 신한승이 1973년 충주에 택견 전수관을 운영한 것으로 보아 집중적인 전수기간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15. 예용해, 1973 「무형문화재 조사보고서 제102호」 이 보고서에 4.송덕기 조사자료 (1) 택견의 열 한가지 기본수에는 ①깎음다리②안짱걸이③안우걸이④낚시걸이⑤명치기⑥곁치기⑦발따귀⑧발등걸이⑨무르팍치기⑩내복장갈기기⑪칼재비로 기술되어 있다.

  16. 기존 보고서에서 존재하지 않지만 이보형, 1983 「택견 무형문화재 전수실태 조사」에서 장대걸이, 촛대걸이, 줄띠지르기는 이전 보고서(예용해, 오장환, 임동권)에는 존재하지 않는 기술들이다. 이 기술들은 박종관, 1983 『傳統武藝 택견』에 정확히 소개되고 있고 송덕기의 초대 제자들로 구성되었던 서울택견계승회 수련표에 존재하는 명칭이다.

  17. 대한태권도협회, 1971 「살아있는 태껸인 송덕기 옹」『태권도』 제3호, 12쪽에는 “첫 째 서로 맞서서 대련을 준비하는 자세는 『품』(品)이라고 하며 품이 움직이면 『굼실』이라고 한다. 계속 움직일 때는 『굼실 굼실』. 『안짱다리』 상대의 발을 안으로 딴지 거는 것. 『박장다리』 밖으로 딴지. 『낚시걸이』 내발목을 꼬부려서 상대 뒤발목을 걸어 넘기는 것. 『무릎걸이』 유도 술어에 배대치기. 『발등거리』 발등으로 차기. 『곧은 발질』 곧은 발차기. 『곁치기』 안으로 옆차기. 『두발 당상』 두발뛰어차기. 『날 치기』 손집고 몸돌려 땅재주 넘어가며 발로 상대 얼굴 차기. 『칼 잽이』 아금손으로 상대 목 치기. 『이마 재기』 상대 이마를 장칼바닥으로 치기. 『낙함』 턱빼기. 장칼 바닥으로 상대턱을 치는 것. 『턱 걸이』 장칼 바닥으로 상대턱을 치며 미는 것. 『깍금 다리』 상대 정강이 후려까기.”로 품(品)과 움직임을 표현한 굼실을 뺀 나머지는 14개이다. 하지만 이 자료 역시 박종관, 1983 『傳統武藝 택견』에 비교하면 송덕기 기술대한 이전의 조사가 얼마나 이해가 없었는지 확인할 수 있다. 이 책에는 기본자세 및 준비 9개, 손기술 26개, 발기술 31개로 기록하였고, 저자 박종관은 송덕기와의 대담과 사진자료를 통해 이 저서에서 송덕기 택견을 소개하였다.

  18. 오지웅, 2011 「택견의 현대화 과정에 나타난 갈등구조 연구」 용인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47~53쪽.

  19. 정재성, 2003 「택견의 전통성 문제」『한국체육철학회지』 11권 2호, 165~166쪽에서 “이들의 사후에 남겨진 전승자들은 자신들의 입지와 처지에서 스스로의 부족함을 스승들의 덕과 위업으로 포장하기 위해 양보와 타협 없이 갈등하기 시작했다. 그 과정이 상호의 택견 운용원리에 대한 비방과 견제였고, 결국 택견 계보상의 존재를 부정하기까지 이르렀다.”라고 그 당시 상황을 말하고 있다.

  20. 최종삼․장경태, 2002 「택견 경기규칙 변천에 관한 고찰」『대한무도학회지』 7권 4호, 116쪽에서 “송덕기, 신한승 사후(1987)에 일어난 각 계파 간 갈등이 심화 되었다. 그리하여 3기인 1991년부터는 대한택견협회, 한국전통택견회, 결련택견계승회가 각기 다른 경기규칙을 적용하여 경기를 진행하고 있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21. 최종삼․이병익․한창효․장경태, 2002 「택견의 경기규칙 특징에 따른 통합에 대한 논의」『무도연구소지』 13권 1호, 227쪽.

  22. 이승수, 2009 「무예 원형의 제도화: 택견을 중심으로」『체육사학회지』14권 3호, 116쪽에서 이 문제에 대해 서론으로 제시를 하였고 “대한체육회 가맹을 앞두고 대한택견협회에 대해 각 택견협회들은 서명 운동과 법정소송, 지도자 삭발식, 대규모 집회를 계획하였다(「택견인들 집회 열어 강력 항의」『충청매일』 2005년 1월 17일).” 이것과는 다른 문제로 한국전통택견협회와 택견원형보존회간에 문제를 다루고 있다(「택견인들 법정비화 조짐 기사」『충청투데이』2005년 2월 17일).

  23. 정가맹 이전에 대한체육회에서 권고사항에 대한 내용은 이렇게 표현이 되어 있다. “대한체육회는 이번 택견문제를 계기로 대한택견협회는 준가맹 승인당시의 승인조건 이행실적을 지속적으로 이행하는 의미에서 명칭변경, 원형보존, 집행부 임원배분, 경기규정 등 세부제안 내용을 6개월 이내에 충실히 이행한다는 것과 문화재청의 권고사항 등 택견단체의 요구사항을 최대한 수용하여 2005년 8월 2일까지 정관개정 및 재규정을 제정하는 것으로 유도했다. 또 대한체육회는 대한택견협회 및 택견단체는 정가맹 승인권한이 대한체육회 제21차 이사회(05.02.02)에 상정된 정가맹 승인추진은 일단 유보키로 결정했다는 이행각서를 각 단체에 제시했다(「못 말리는 택견, 대한체육회 중재 나서」『MOOKAS뉴스』2005년 2월 1일).” 

  24. 택견대통합 행사를 2007년 4월 3일에 서울 올림픽 공원 역도경기장에서 진행을 했다(「택견, 대중화를 위한 출발선을 끊다」『MOOKAS뉴스』2007년 4월 3일). 하지만 유네스코 지정 이후 나온 기사는 다음과 같다. “유네스코의 요구처럼 택견은 국가지정 문화재로서 예능보유자를 중심으로 전승․보급․발전을 이뤄왔고, 현재 50여명의 공식 이수자가 있는 한국택견협회가 택견의 전승․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지만 택견의 스포츠화를 추구하는 대한택견연맹과는 경기 방식에서 현격한 차이를 보이며 지속적인 논란이 되고 있다. 이 같은 문제는 택견이 문화재청과 문화체육관광부 등 정부부처의 이원화 체제로 관리되면서 발생되는 택견단체의 난립과 갈등이 해소되지 않고 오히려 더 커지고 있다는 데 있다. 택견의 주무부서는 문화재청으로 택견의 법인단체 설립허가가 문화재청 소관이지만 상위부처인 문광부에서 체육단체 법인 설립을 허가하면서 복수의 택견단체 설립이 인정된 이후 계속 택견의 분화가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 현행법체계상 문제는 국민체육진흥법에 의한 택견의 존재이다. 문화재보호법과 전통무예진흥법상 택견은 세계유산보호 관련 국제협약에 부응하지만 국민체육진흥법상 택견의 존재는 국제협약에 부합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택견 단체 난립도 문제지만 국가정책 안에서 일원화되지 못한 것은 무분별한 개발 등으로 세계유산의 문화재가 훼손되는 경우로 국제협약 상 치명적인 약점이 되기 때문이다. 또 무술 부분에 유네스코 자문기구인 세계무술연맹의 본부를 한국의 충주에 두고 있다는 점에서 택견의 무분별한 개발과 단체난립으로 제대로 보호되지 못할 경우 세계무형유산인 충주 택견의 훼손은 물론 자칫 지정 취소라는 최악의 상황을 맞을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세계무술연맹 본부를 둔 충주의 가치가 없어지고 국가신뢰도 추락 등도 우려된다. 이 같은 사태를 막기 위해서는 먼저 택견의 유네스코 무형유산 등재를 계기로 택견인들이 정체성 논란을 지속하기 보다는 하나 된 택견을 위한 희생과 자구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이와 함께 정부가 나서 법과 제도 개선을 추진해 정책실행 주체의 일원화를 선행해야 한다는 지적이다(「세계유산, 택견통합 정부가 나서야」『충청타임즈』2011년 12월 6일).” 이 같은 문제는 여전히 댓글을 통해 누리꾼들로부터 화재거리이다.

  25. 신한승(辛漢承, 1928~1987) 서울 하왕십리에서 태어난 신한승은 유년시절 경기도 연천군 삭녕면의 천석꾼 부자인 작은 할아버지 신재영의 집에서 처음 택견과 접하였다. 신재영의 사랑방엔 항상 무인들이 몇 명씩 묵으며 택견을 보여주곤 했는데 대부분 한량이어서 집안 어른들은 신한승이 택견 흉내 내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1949년 경희대 전신인 신흥대학 체육학과 레슬링 전공 1기생이며 1956년 멜버른 올림픽 국가 대표 최종 선발전에서 국가대표의 꿈을 이루지 못하였다. 1957년 충주 한림중학교 체육교사를 하다 1년 만에 그만두고 서울 아세아극장에서 기도(木戸:きど) 일을 했다. 1970년 송덕기의 기사를 보고 서울로 가서 5년간 택견을 익혔다. 또 74년 박털백의 전수자인 이경천과 박무경의 전수자인 김홍식에게 활개짓 활용법과 낚시걸이 등의 수를 배웠다고 한다. 생계가 어려워질 정도로 택견연구에 힘을 쏟았고 1981년 11월 문화재 지정조사를 의뢰하였다. 1983년 6월 1일 문화재를 지정받는데 큰 공로를 세우고 1986년 대장암 수술을 받고 또 다른 전통무술인 수벽치기를 복원하기 위해 노력을 했다. 1987년 7월 2일 충주 의료원에서 생애를 마감했다.

  26. 택견계의 전수자들의 대부분은 신한승에게 전수받은 제자들이 주를 이룬다. 송덕기, 신한승 양 쪽으로 전수받거나 신한승의 제자들을 지칭한다.